오키나와, 미군 횡포-정부 무관심 고통 겹겹
▲ 가데나마을과 좁은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둔 동아시아 최대의 미군기지인 가데나기지, 담 너머로 P-3C 대잠초계기들이 24시간 대기 중이다. 마을 땅의 대부분을 기지에 빼앗긴 주민들은 24시간 비행하는 미군기 때문에 고통을 당하고 있다고 호소한다.
일본 최남단 오키나와는 60년 동안 주일미군 기지의 대부분을 떠안은 채 미군의 태평양지역 거점 역할을 하고 있다. 그동안 미군기지 철수와 평화를 요구하는 오키나와인들의 노력도 꾸준히 계속돼 왔다. 마무리 단계에 들어선 주일미군재편 계획의 핵심인 오키나와를 찾아가 주민들의 목소리를 들어봤다.
이번 취재는 오키나와현과 일본국제교류기금이 주최한 ‘아시아태평양유스포럼’ 참가를 계기로 이뤄졌다.
미군기지로 인한 비슷한 문제들을 안고 있는 한국에 오키나와 미군기지 이슈가 조금씩 알려지긴 했지만, 실제로 찾아가 본 오키나와섬 곳곳에는 가는 곳마다 미군기지가 과도하게 집중돼 주민들의 일상을 뒤덮고 있고, 오랫동안 점령과 전쟁, 미군기지 등 역사적 상처로 고통받아온 이곳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일 수 있었다. 반면 현정부와 오키나와인들이 오랫동안 힘을 합쳐 미군기지 문제점을 해결하려고 노력해 왔고, 적지만 조금씩 기지 반환을 이뤄내고 있는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미·일 정부의 협상에 따라 기지가 반환된 땅에서는 오염이 심해 정화작업을 하고 있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편집자>
(오키나와 미군 기지 분포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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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낮 없는 군용기 굉음…사실상 섬 전체가 미군땅
일본 남부 오키나와의 카데나마을, 마을 땅의 83%를 미 공군기지가 삼키고 있다. 1995만㎡ 면적의 카데나기지는 동아시아 최대의 미 공군기지로 군용기 125대가 24시간 쉬지 않고 뜨고 내린다.
1월 중순 찾아간 카데나마을,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둔 기지 담 바로 너머에는 P-3C 대잠초계기들이 항상 대기하며 끝없는 소음을 뿜어내고 있었다. 잇따라 이륙하는 미군기의 굉음 때문에 한 여름에도 아이들이 창문을 닫고 수업해야 한다고 주민들은 호소한다. 이 마을 공무원인 와카타 시키토코는 “주민들은 야간비행이라도 중지해 달라고 미군에 여러 차례 요구했고, 미군은 오후 10시부터 오전 6시까지는 비행하지 않겠다는 약속도 했지만 지켜진 적이 없다. 하루 150번씩 비행하는 날도 있고, 한해 동안 소음이 78㏈ 이상 치솟는 횟수가 4만번이 넘는다”고 말했다.
2차대전 직후 미군이 오키나와를 점령하고 기지를 설치하면서 땅을 뺐긴 많은 주민들은 마을을 떠났다. 마을 공동묘지는 옮길 수 없어 기지 안에 남겨졌고, 주민들은 성묘할 때마다 미군의 허가를 받고 들어가야 한다. 미군 1만5천여명이 주둔하는 카데나기지 안에는 주택과 극장, 골프장, 대학교까지 있지만, 미군들은 언제라도 자유롭게 오키나와 전역을 돌아다닐 수 있다.
계속 되는 군용기 추락사고도 주민들을 불안 속으로 몰아넣는다. 1월17일에도 카데나기지 주변에서 미 F-15 전투기가 추락했고, 오키나와현 정부는 사고 원인이 밝혀지기 전까지 비행을 중지해 달라고 요구했지만 미군은 자체조사 결과 문제가 없다며 이틀 만에 비행훈련을 재개했다.
에메랄드빛 바다와 아열대 기후의 관광지로도 유명한 오키나와는 일본 전체 면적의 0.6%를 차지하지만, 주일 미군기지의 75%를 떠맡고 있다. 이곳에는 해병대를 위주로 미군 2만5천명 이상이 주둔하고 있으며, 37개의 기지는 오키나와 본섬의 20%를 차지한다. 오키나와현 우라소에시 시의원인 마타요시 켄타로는 “우리는 미군기지와 미군기지 사이에서 끼어 산다”고 말한다.
카데나기지에서 차를 타고 남쪽으로 20분쯤 가니 후텐마 공군기지에 도착했다. 평범한 주택가를 지나 산 위로 올라가니 촘촘히 들어선 집들과 대학 바로 옆에 미군 헬기 기지가 나타났다. 이곳은 지난 10년 동안 미국과 일본 사이에서 뜨거운 쟁점이 돼온 곳이다. 95년 이 기지에 주둔하던 미군이 초등학생을 강간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60여년 동안 수만건의 미군 범죄로 고통받던 주민들의 분노가 폭발했다. 주민 8만명 이상이 연일 시위를 벌이자, 미·일 정부는 결국 기지 이전에 합의했다. 그러나, 첫 이전지로 결정됐던 헤노코 지역 주민들의 끈질긴 반대 시위가 계속되자, 두 나라 정부는 최근 다시 나고시에 있는 기존 슈와브기지를 확장해 이전하는 계획을 추진 중이다.
▲ 오키나와 가데나 미공군기지 앞에 있는 술집.이 기지 주변에는 미군들을 위한 술집과 각종 가게들이 즐비하다.
‘주일미군 재배치’에 운명 달려…여론분열 양상도
오키나와 미군기지의 운명은 현재 미국과 일본 정부가 협상중인 주일미군 재배치계획에 따라 결정된다. 1월18일에도 누카가 후쿠시로 일본 방위청 장관이 워싱턴을 방문해 도널드 럼스펠트 미 국방장관과 이 문제를 협의했다. 현재 중간발표가 끝난 이 계획은 아시아 지역 일본의 군사적 역할과 미·일 동맹을 강화하면서, 주민들의 반발이 심한 오키나와에 주둔 중인 미 해병대 일부를 괌과 일본 본토 등으로 분산배치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류큐대학의 가베 마사키 교수는 “미국은 해외주둔미군재배치계획(GPR)에 따라 병력과 기지 일부를 줄여 신속기동군으로 재배치하겠지만, 결국 중국 봉쇄 등을 위해 오키나와에 거점을 계속 남기게 될 것”이라고 내다보면서 “오키나와 미군 기지 문제가 장기적으로는 해결되겠지만 지금으로선 낙관적이지 않다”고 말했다.
삶의 곳곳에서 미군 기지가 일으키는 갖가지 문제를 떠안아야 했던 오키나와인들은 꾸준히 “미군기지 철수”를 요구하며 문제를 해결하려고 애써왔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미군기지가 떠나면 그렇지 않아도 일본 안에서 가장 낙후된 경제가 무너지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이들을 사로잡는다. 류큐대학에서 만난 한 대학생도 “미군기지 없는 삶을 원하지만 경제가 걱정이다”라고 말했다. 슈와브기지를 확장해 후텐마기지 시설을 받아들이는 문제가 최대 쟁점이 됐던 22일 나고시 시장선거에서도 결국 기지 확장에는 반대하지만 경제발전을 위해 협상할 수 있다는 후보가 당선됐다.
기지 땅에 대한 소유권이 있어 매년 일본 정부로부터 상당한 임대료를 받는 대지주, 기지 고용인들과 나머지 주민들 사이에 여론 분열도 나타나고 있다. 주민들은 지주와 기지 고용인들은 주민들중 극히 소수이며, 나머지 사람들이 일상에서 겪는 피해를 고려하면 경제적 이익은 없다고 반박한다. 135만명 주민중 기지 고용인은 8천여명 정도이며, 실제로 카데나마을 주민 1만4200여명중 카데나기지에 고용된 사람은 100여명 정도다. 미군기지와 관련된 수입이 오키나와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차대전 직후 40%에서 5%정도로 줄었다.
▲ 오키나와 평화기념관 밖에 세워진 위령비.1945년 오키나와 전투 당시 숭진 민간인 12만명과 미군,일본군과 강제징용된 조선인등 23만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본토 이기주의도 상처…주민 21%만 “나는 일본인”
오키나와 사람들은 고통스런 짐을 오키나와에만 떠넘긴 일본 정부와 본토 사람들의 이기적 태도에 더 큰 상처를 받는다고 말한다. 류큐대학의 마사키 교수는 “오키나와는 일본 본토로부터 멀리 떨어져 격리돼 있고 국내 정치에서도 사소한 문제로 취급되기 때문에 보통 일본인들은 이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오키나와인들의 ‘소외감’은 본토 일본인들과 거리를 두는 그들의 독특한 정체성으로도 나타난다. 류큐대 존 촨튱 림 교수의 설문조사에서 오키나와인의 40.6%는 그들을 ‘오키나와인’으로만 여긴다고 답했고, 36.5%는 오키나와 일본인 또는 일본계 오키나와인으로 생각하며, 21.3%만이 ‘일본인’으로 생각한다고 답했다.
야라 도모히로 <오키나와타임스> 기자는 “일본 정부는 미군기지를 오키나와로 집중시켜 ‘오키나와만의 문제’로 만들어 버렸으며 일본인 다수는 이 문제를 알려고 하지 않고 눈을 감고 있다. 일본은 자위대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무장한 상태이며 정말 이 지역에 이렇게 많은 미군을 주둔시킬 필요가 있는지 의문이다. 오랫동안 북한 때문이라고 하더니 이제는 중국 위협론을 핑계로 대고 있다”고 말했다.
오키나와/박민희 기자 minggu@hani.co.kr
기사등록 : 2006-01-31 오후 07:37:20 기사수정 : 2006-01-31 오후 08:17:43
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japan/98968.html
진정한 안보는 주민 삶에 기반해야
다카자토 스즈요 ‘군폭력반대오키나와 여성행동’ 공동 대표
“안보를 위해 오키나와 미군기지가 있다고 하지만 무엇이 진정한 안보인지 고민해야 한다. 이곳 사람들의 삶을 파괴하는 군사적 안보가 진정한 안보인가? 사람들은 중국과의 긴장이나 북한 문제 등 큰 안보문제만 얘기하지만, 진정한 안보는 사람들의 삶에 기반해야 한다.”
자그마한 체구에 조용한 말투, 그러나 강인함이 느껴지는 다카자토 스즈요 ‘군폭력반대오키나와여성행동’ 공동 대표는 ‘골리앗’ 미군 기지에 맞서온 오키나와인들의 인내와 힘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다카자토 대표는 20년 넘게 미군 성범죄 피해 여성에 대한 법률·의료 지원과 상담, 그들의 아이들을 돕는 활동을 해왔고, 미군 기지의 구조적 문제점을 알리면서 평화운동을 벌이고 있다. 오키나와 나하시 시의원으로 15년간 활동하기도 했다. 95년 후텐마기지 미군의 초등생 강간 사건을 계기로 한국·필리핀의 여성단체들과 연대해 ‘군사주의반대국제여성네트워크’를 만들어 미군 기지와 폭력에 반대하는 공동노력도 계속하고 있다.
다카자토 대표는 “60년 동안 오키나와 사람들은 미군기지 소음과 오염, 토지 부족, 범죄 등으로 고통 받아왔다. 미국과 일본 정부는 안보만 강조하지만 실제로 고통을 당하는 것은 이곳 사람들이다. 97년 조사에서 카데나지역은 전국에서 저체중 신생아 비중이 가장 높았고, 일본 법원은 카데나기지 비행기 소음이 주민들 건강에 악영향을 미친다고 인정했지만 판결 이후에도 안보를 이유로 비행이 계속되고 있다”고 말했다.
다카자토 대표가 내민 오키나와 미군범죄 피해 기록은 충격적이었다. 그는 “미군이 오키나와를 점령한 2차대전 직후부터 한국전쟁 당시까지 미군들이 여성들을 집이나 밭, 강가에서 총칼로 위협하며 납치해 무차별로 강간·윤간했으며, 심지어 9달된 여자 아이가 피해자인 사건도 있다.한국전쟁 당시에는 미군들이 더욱 폭력적으로 변해서 마을 입구마다 종을 설치해 미군이 마을로 다가오면 종을 울려서 여성들이 피하도록 알려야 했다”고 말했다. 당시 기지 주변엔 성매매 산업이 번성했고, 강간 뒤 피해여성을 잔인하게 살해하고 시체를 버리는 사건들도 일어났다. 오키나와가 일본 영토로 반환된 72년 이후에는 성매매가 불법화됐지만, 여전히 데이트 강간 등 미군의 성범죄가 잇따르고 있다.
다카자토 대표는 “불평등한 해외주둔군지위협정(SOFA) 때문에 이런 범죄가 일어나도 가해자를 제대로 처벌하지 못했으며, 최근 부시 행정부는 국제형사법정에서 전범과 인권범죄, 대량학살을 처벌하려는 국제사회의 노력까지 무산시키려 하고 있다”면서 미군 범죄가 힘의 불평등 관계와 군사주의에서 나오는 구조적 문제라고 강조했다.
그는 “미군이 나가고 자위대가 들어온다고 해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미·일 정부가 협의중인 것처럼 괌이나 필리핀 등으로 오키나와 미군 기지를 이전해 우리 고통을 고스란히 그들에게 떠넘기는 것도 반대한다. 우리는 세계가 덜 군사적으로 바뀌는 것을 소망한다. 2000년 우리는 주요 8개국(G8) 회담에 참석한 정상들에게 국방예산을 5%만 삭감해 빈곤국들을 지원하라고 제안했다. 그러나, 현실에서 부시 행정부는 계속 국방예산을 늘려가고 있다”고 안타까운 현실을 지적한다.
다카자토 대표는 “88년 중학생 아들을 데리고 미군기지 반환 요구 시위에 참가했었다 이제 38살이 된 아들이 6살된 딸을 데리고 또 비슷한 시위에 참석하고 있다”며 “나아지지 않는 상황 때문에 때로는 무력감을 느끼기도 하지만, 아무 것도 하지 않고 포기할 수는 없으며 우리는 계속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오키나와/박민희 기자
오키나와는
19세기까지도 번창한 독립왕국
1879년 일본에 점령돼…태평양전쟁 때 12만명 희생
일본과 중국, 동남아를 잇는 요충지에 위치한 오키나와는 19세기까지도 독립된 류큐왕국과 고유 문화를 유지하며 중계무역으로 번성했다.
1879년 일본에 점령돼 오키나와현으로 편입됐다. 태평양전쟁 말기인 1945년 3월~6월 일본 정부가 본토 방어 시간을 벌기 위해 오키나와에서 민간인 총동원령을 내려 미군의 북상에 저항하면서 ‘철의폭풍’으로 불리는 치열한 전투에 휘말렸으며, 당시 오키나와 인구의 4분의1인 12만명의 민간인이 숨졌다.
2차대전 직후부터 20년 넘게 미군의 직접 통치를 받으면서 곳곳에 기지가 세워지고 미군의 태평양지역 전략거점이 됐다. 주민들의 끈질긴 요구로 1972년 일본에 반환됐다. 주민들은 일본에 반환되면 미군기지가 철수할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일본 정부는 미일안보조약에 따라 모든 미군기지를 그대로 인정했다.
역사적 경험을 통해 오키나와인들은 평화의 소중함을 깨달았다. 섬 남부에 세워진 평화기념관은 전쟁과 미군기지의 고통스런 경험을 정리하면서 “어떤 경우에도 전쟁은 용인될 수 없다”는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기념관 밖 희생자 기념비에는 1945년 전쟁 당시 ‘가해자’였던 미군부터 강제징용돼 희생된 한국·대만인까지 사망자 23만9202명의 이름을 검은 돌에 새겨 놓았다.
오키나와/박민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