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January 23, 2006

경제통과 경제꼴통

미국에서 시장경제를 열렬히 옹호하는 세력은 누구인가? 물론 시장의 강자인 부자들이다. 그래도 그 사회에는 기부문화가 정착돼 있고, 부자·기업인·정치인 중에도 고소득층의 세부담을 대폭 늘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많다. 조지 소로스, 빌 게이츠, 빌 클린턴이 잘 알려진 사례들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양극화 해소를 위해 고소득층에 세금을 더 물릴 뜻을 비치자, 한국 주류사회의 반응은 전혀 딴판이다. 경제 저널리스트, 언론의 단골 경제학자, 경제에 일가견이 있다는 정치인 등 ‘경제통’들은 거의 반대 일색이다. 요약하면, “우리 조세부담률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들보다 낮지 않은데” “왜 실패한 유럽 복지국가 모델을 추종해 세금을 더 거두려 하느냐”는 것이다. 그리고 “양극화 해소책은 성장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우선 조세부담률과 사회보장지출의 비중을 한번 따져보자. 두 가지 지표에서 우리는 경제협력개발기구 회원국으로는 멕시코와 더불어 꼴찌 수준이다. 그럼에도 의료보험료 등 준조세와 사교육비를 합하면 그들보다 부담률이 낮지 않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런 부문이야말로 수익자 부담이 아니라 세금을 거둬 국가가 부담해야 할 사회복지의 핵심이다. 유럽 복지국가에서는 돈이 없어 병원에도 못 가보고 죽는 일은 없다. 북유럽 복지선진국에 못 미치는 프랑스, 독일만 해도 대학까지 학비부담이 없어, 교육기회의 불균등이 소득 양극화의 출발점이 되지는 않는다. 아니할 말로 ‘영국 실업자’인 필자가 의료비 걱정 없이 자녀 셋 공부시킬 수 있는 것은 이곳 사회복지체제, 좁혀 말하면 영국 고소득자들 덕분이다.

90년대 중반 이후 유럽국가 상당수가 사회보장지출 비중을 조금 줄인 것은 사실이지만, 복지국가를 실패한 모델로 규정짓고 ‘반면거울’로 삼자는 것은 웃기는 발상이다. 마치 마라톤에서 선두주자들이 반환점을 약간 돌아서는 것을 보고, 아직 출발선도 크게 벗어나지 못한 꼴찌 주자가 자기도 뒤돌아 뛸까 하고 망설이는 형국이다. 그들의 사회보장지출 비중은 여전히 우리의 2~3배에 이르고, 오스트레일리아 일본 등 많은 나라들은 비중을 더 늘렸다. “복지 수혜자들이 의타심에 빠져 경제와 사회가 무기력해진다”는 설명은 한국 빈곤층에 대한 ‘인격모독’이다. 일선기자 시절 경험이지만, 서울의 빈민촌인 난곡동을 이른 아침에 방문했다가 일터로 향하는 인파에 감동받은 적이 있다. 세계 어느 도시의 게토나 달동네에 ‘잘 살아보자’는 의지가 이토록 충만한 데가 있을까? 한국인 노동시간은 30개 경제협력개발기구 회원국 중 최장인데도, 상대적 빈곤율은 최고수준이다.

고전파 경제이론에 따르면 부유층은 한계저축성향이 높아 부의 집중이 고투자-고성장으로 이어진다고 하지만, 한국에서는 부유층 여유자금이 버블경제의 요인이 되고 있다. 세금 없는 불로소득이야말로 의타심을 키우고 우리 경제와 사회를 무기력하게 만든다. 성장과 분배에 대한 90년대 이후 연구들은 불평등이 심한 나라일수록 성장률이 낮고 재분배정책을 통해 경제성장을 촉진할 수 있다는 것을 실증했다. 최근 대표적인 경제학 교과서들까지 이를 주류적 견해로 소개하고 있으나 한국의 주류들은 정작 이를 외면한다. “분배가 성장을 해친다”는 논리는 분배정책을 무력화하기 위한 가공의 대립개념이라 할 수 있다. 신고전파 경제학자 마샬은 경제학도에게 ‘차가운 머리, 따뜻한 가슴’을 가질 것을 당부했지만, 한국에서는 ‘뜨거운 머리, 차가운 가슴’의 ‘경제꼴통’들이 주류를 이룬 탓일까? 최소한의 사회안전망을 갖추자는 제안마저 거센 반대에 부닥친다.

이봉수/영국 런던대 박사과정·경제저널리즘

기사등록 : 2006-01-23 오후 07:15:30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97309.html

0 Comments:

Post a Comment

<< Ho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