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August 21, 2006

'귀동냥과 탐정 놀이'..대가들의 정보 사냥법

by 친절한 금자

저명한 투자 대가들의 정보 입수 방법에 대해서 적었네요.
'탐정과 투자가'라는 책도 살짝 소개하구요.

재미있는 글이고, 하나 있는 답글도 생각해볼만합니다.

http://itooza.com/board/view.php?no=21096&category=505&board=0&page=1

Saturday, August 05, 2006

유토피아도 디스토피아도 오지 않아

[기술속사상] 유토피아도 디스토피아도 오지 않아

기술은 목적 위한 중립적 수단이 아니다
인간과 세계 사이 개입하며 ‘실존’ 변형
경험을 확대하는 동시에 축소하고
때론 새로운 세계에 접근할 통로가 되며
공기처럼 숨어있는 배경이 되기도 한다


기술 속 사상/④ 인간과 기술 공생 강조-돈 아이디


» 인간과 기계가 융합된 사이보그 이미지. 기술이 인간 삶의 양식에 필수적인 존재가 된 이제 인간과 기술의 관계를 유토피아냐 디스토피아냐는 단순이분법으로 파악할 수 있는 시대는 지나갔다. 기술시대엔 인간과 기술의 관계, 그리고 인간이해도 달라져야 한다.


오늘날 인간의 문제, 특히 인간의 실존과 관련된 문제는 기술을 배제하고 더 이상 논의될 수 없다. 주위를 둘러보라. 초음파 기기의 인체 질환 진단, 전자 현미경의 물질 나노구조 분석, 전파 망원경의 우주 현상 관찰, 대중매체를 이용한 커뮤니케이션 등등 기술을 통하지 않고 과연 우리가 세계와 의미 있게 만날 수 있겠는가? 오늘날 기술은 인간 삶의 양식에서 매우 필요한 존재가 돼버렸다. 그렇다면 이러한 기술시대에 인간과 기술의 관계, 그리고 그에 기초한 인간이해도 분명 달라져야 할 것이다.

인간과 기술의 관계는 그동안 주로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의 이분법적 관점에서 해석되어 왔다. 기술에서 인간 삶의 질을 개선할 유용성과 함께 궁극적으로 인간을 해방시킬 조건을 보았던 유토피아적 입장이 한쪽 끝에 있었다면, 다른 쪽 끝에 환경 파괴적 속성과 인간의 존재방식을 지배하려는 억압성을 현대 기술에서 발견한 디스토피아적인 입장이 존재하였다. 그러나 이 두 관점은 오늘날 인간과 기술이 매우 복잡하고 다양한 관계로 만난다는 사실 때문에, 인간과 기술의 관계에 관한 설득력 있는 입장으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이와는 다른 방식으로 인간과 기술의 관계에 접근할 필요가 있다. 돈 아이디(Don Idhe, 1936~)는 이 문제에 적극적인 관심을 갖고 오랜 동안 연구해 온 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특히 컴퓨터와 정보기술이 발달한 1970년대부터 이 문제에 접근함으로써, 기존 논의들에서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실천적 논의를 이끌어내고 있다.

그의 출발점은 아이러니컬하게도 디스토피아적 관점을 고집한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다. 아이디는 하이데거와 마찬가지로 기술을 세계를 이해하는 하나의 방식, 인간이 존재자들과 교섭하는 하나의 방식으로 규정하였다. 기술이 야기한 결과들 혹은 효과들보다는, 기술현상 그 자체 곧 현상적 차원에서 생생하게 감지되는 기술의 본성과 그 역할에 주목한 것이다. 또한 현대의 기술은 단순히 목적을 위한 중립적 수단이 아니며, 인간과 세계 사이에 개입하여 그 관계를 굴절시키고, 궁극적으로 인간의 실존방식에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준다는 점도 동일하게 받아들였다. 하지만 하이데거와 달리 현대 기술의 부정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오히려 현대 기술의 편재함을 깊이 고려한 상태에서 인간의 실존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는 인간학의 새로운 주제를 던져 주었다. 그렇다면 그의 생각은 무엇이며, 그러한 분석이 오늘날 기술에 대한 성찰에서 어떤 의의를 지니는가?


비관론자 하이데거 사유 출발점

아이디는 기술과 인간이 맺는 전형적인 관계들로 체현관계, 해석관계, 배경관계를 주장하고 있다. 체현관계(embodiment relation)란 기술이 우리의 신체 기능을 확장시키는 그러한 역할을 하는 관계다. 망원경으로 달 표면을 관측하는 경우를 생각해 보라. 이 경우 기술은 외부세계의 대상이 아니라 나의 확장된 신체의 일부로 체현되어 ‘확대된 나’ 혹은 ‘유사-자아’가 된다. 세계와 맞선 나와 공생적인 관계를 맺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이렇게 체현된 기술을 통한 경험이 반드시 투명한 것만은 아니다. 기술로 인한 변형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또한 달 표면에 관한 특정한 시각 경험은 확장되고 부각되겠지만, 동시에 달에 관한 다양한 포괄적 경험들-가령 색깔, 깨끗함, 처량함 등-은 축소되고 간과된다. 즉 기술로 인해 나의 경험에서 확장과 축소가 동시에 발생하게 된다. 한마디로 기술은 결코 중립적이지 않다. 기술로 인해 세계에 대한 나의 경험, 곧 나와 세계와의 관계가 일부 변형되고, 나의 실존적 의미도 일부 굴절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은 비단 과학에서의 도구 사용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대중매체나 정보 통신기기들의 활용과 같이 일상생활 속에서도 언제나 동일하게 발생할 수 있다.

해석관계(hermeneutic relation)란 기술이 해석을 요하는 텍스트를 제공할 때 성립하는 관계다. 전자현미경으로 미시입자의 원자구조를 탐구하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전자 현미경에서 특정의 전파를 발생시켜 입자에 쏘고 입자의 어떤 성질이 그것과 반응하여 특정의 물리적 신호를 산출하면, 전자현미경이 이 신호를 수신하여 컴퓨터의 정보처리 과정을 거쳐 그 결과를 우리가 볼 수 있도록 화면에 그림으로 재현해 낸다. 그러니까 화면 속의 그림은 기술에 의해 재구성된 세계에 관한 텍스트인 셈이다. 이는 미시세계에 불가능성 때문에 생긴 결과다. 기술을 통하지 않고는 인간은 미시세계에 전혀 접근할 수 없기 때문에, 어떤 기술을 사용했는가가 세계에 관한 지식을 얻는데 직접적인 조건이 된다. 그래서 기술이 구현해 낸 텍스트만이 우리가 세계를 이해하는 유일한 열쇠가 된다. 정리하면 기술은 더 이상 나의 신체의 연장이 아니며, 오히려 내가 탐구하고 해석해야 할 대상 곧 텍스트로 다가 온다. 한편 사용된 기술에 따라 텍스트들이 달라지므로, 기술은 세계에 대해 매우 불투명하거나 세계를 차단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인간과 기술의 관계에서 해석학적 문제가 중요한 문제로 대두된다. 이는 일상생활 속에 보편화된 컴퓨터의 가상공간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주장될 수 있다. 다만 이 경우 차단이 아니라 처음부터 세계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관측 망원경’ 시각경험만 확장

배경관계(background relation)는 기술이 배경으로 숨어 있으면서 인간과 관계를 맺는 그런 관계다. 가령 컴퓨터의 제어기술로 불빛이 조절되고 난방이 통제되며 실내 공기가 통풍되는 인공지능 건물에, 내가 살고 있다고 생각해 보라. 여기서 기술은 더 이상 신체의 연장 혹은 세계에 접근하는 통로로서가 아니라, 그 자체로 하나의 세계 곧 대기권에 대비되는 ‘기술권’(techosphere)으로 인간과 관계한다. 이것이 바로 인간과 기술사이의 배경관계다. 여기서 우리는 기계들과 직접 관계하지 않으면서 이들을 배경으로 하여 살아가게 된다. 이런 현상은 미래의 유비쿼터스 사회처럼 사회가 고도로 기술화될수록 한층 확대·심화될 것이 자명하다. 한마디로 인간과 기술의 관계는 이처럼 인간이 기술을 통해 세계를 어떻게 경험하는가에 따라 구분되고, 그 본질 또한 달라진다고 정리할 수 있겠다.

아이디의 이러한 분석은 고도 기술시대의 인간을 이해하고자 할 때, 기존과 다른 새로운 해명을 제공해 준다. 인간과 기술의 관계에 관한 전통적인 입장이라고 할 수 있는 체현관계만을 보더라도, 우리는 오늘의 인간이 과거의 인간에 비해 놀라울 정도로 인간적 기능이 확대되고 인간과 세계가 만나는 영역도 훨씬 깊고 넓어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해석관계도 기존에는 도달할 수 없었던 영역(미시세계나 우주 등) 혹은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영역(가상공간 등)을 포섭하는 방식으로 인간적 가능성의 확대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나아가 배경관계에서 논의된 기술권의 등장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인간 삶의 패러다임이 새롭게 바뀔 것임을 강하게 함축하고 있다. 이러한 인간적 가능성의 확대는 기술시대의 인간이해에 반드시 고려되어야 할 요소임에 분명하다. 실제로 현대 기술을 온전히 긍정하는 낙관론의 입장은 바로 이러한 측면들을 배타적으로 지나치게 강조하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해 축소시킨 기술 반성적 비판

그러나 우리가 결코 놓쳐서는 안 될 또 다른 중요한 요소가 있다. 그것은 인간적 가능성의 이 같은 확대가 필히 또 다른 가능성의 축소를 수반한다는 점이다. 가능성의 확대가 주로 자연현상의 정밀한 관측에 용이한 시각적 혹은 청각적 경험 등과 같은 특정한 경험들에 국한된 반면, 축소는 인간의 정서적 감성들을 포함하는 포괄적인 경험 전반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이 문제는 매우 심각하다. 이는 세계를 그 자체 있는 그대로 경험하지 못하고 특화된 그것도 몇몇 단일-감각적인 도구들에 의거해서만 제한적으로 보도록 함으로써, 결국 세계 혹은 현상에 대한 축소된 이해를 야기하기 때문이다.

특히 이것이 인간의 자기이해와 관련된 현상들인 경우, 인간의 자기이해에 있어서도 축소가 불가피해진다. 한편 기술의 개입으로 인한 특정 경험의 확장은 인간에게 매우 극적이고 환영할 만한 것으로 언제나 강하게 각인되지만, 다른 포괄적 경험들의 축소는 흔히 무시되거나 간과되어 이를 자각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도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이를 자각할 수 있는 반성적 비판도 뒤따라 주어야 한다. 결론적으로 기술시대에 새롭게 드러난 이 양자의 측면을 동시에 고려할 때, 기술시대의 인간에 대한 올바른 이해에 도달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인간의 능력을 확장시키는 기술과의 공생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이 아이디 기술철학의 중요한 함축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중원/서울시립대 교수·과학철학
jwlee@uos.ac.kr


기사등록 : 2006-05-11 오후 10:03:43
기사수정 : 2006-05-15 오전 02:58:51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122792.html

Wednesday, August 02, 2006

한국가정엔 아빠가 없다, 마이니치신문 조사

장시간 노동과 회식 등으로 귀가 늦어


"한국 아빠들의 귀가가 늦는 주원인은 장시간 노동과 '회식'이다"

마이니치(每日)신문은 2일 일본 국립여성교육회관이 한국과 일본, 미국, 프랑스, 태국, 스웨덴 등 6개국에서 12살 이하 자녀를 둔 부모 각 1천명을 상대로 실시한 '가정교육에 관한 국제비교 조사' 결과를 소개하면서 한국 가정에서 '아빠 부재'의 원인을 이처럼 분석했다.

이 조사 결과, 6개국 가운데 아빠가 아이들과 지내는 시간이 가장 적은 나라는 한국으로 하루 2.8시간에 그쳤다. 일본은 3.1시간으로 한국을 약간 웃돌았으며 프랑스 3.8시간, 미국과 스웨덴 4.6시간, 태국 5.9시간 등으로 파악됐다.

스웨덴의 아빠들이 2명 중 1명꼴로 아이의 식사를 챙겨주는데 비해 한국은 5명 중 1명, 일본은 10명 중 한명에 불과했다. 아이들의 예의범절을 가르치는 등 가정교육에 참여하는 비율도 일본은 절반, 한국은 60% 수준으로 미국이나 프랑스에 미치지 못했다.

유치원의 학부모 행사에 참가하는 아빠의 비율은 한국과 일본 모두 10% 미만에 그쳤다.

한국과 일본 아빠들이 아이들에 소홀한 가장 큰 원인은 장시간 노동이 꼽혔다. 일주일에 49시간 이상 일하는 아빠는 일본이 53.4%, 한국이 53.0%로 절반을 넘었다. 특히 한국은 60시간 이상 일하는 비율이 31.7%로 가장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조사를 실시한 국립여성교육회관측은 가정에 아빠가 '부재한' 한국과 일본 아이들은 얌전하게 밥을 먹는 등의 예의범절을 배우거나 자립하는데 다른 나라 아이들보다 늦어지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고 지적했다.

한국이 일본 이상의 고도 경제성장을 달성한 나라인데다 에너지와 금융위기 이후 두드러진 개혁과 실업, 양극화 체험 등이 혼재하는 상황에서 일하는 아빠와 아이들의 접촉이 적은 것은 무리가 아니라고 마이니치 신문은 분석했다.


신지홍 특파원 shin@yna.co.kr (도쿄=연합뉴스)

기사등록 : 2006-08-02 오전 09:30:34

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japan/145970.html

블랙홀은 존재하지 않을 지도

블랙홀에 관한 기존 이론은 매우 부정확할 지도 모르며 어쩌면 블랙홀 자체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고 가디언지 인터넷판이 최근 보도했다.

하버드-스미스소니언 천체물리학 센터의 루디 실드 박사 등 연구진은 천문학 저널 최신호에 실린 연구 보고서에서 주변의 모든 물질을 삼켜 버리는 블랙홀들이 우주에 촘촘이 박혀 있을 것이라는 기존 천문학 이론은 블랙홀의 자리에 자성(磁性)을 띤 이상한 플라스마 덩어리들이 떠 다닌다는 새로운 이론으로 대체돼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만일 이들의 연구 내용이 사실로 밝혀진다면 아인슈타인에 의해 입증되고 스티븐 호킹에 의해 다듬어진 블랙홀 이론은 허구가 돼 버린다.

연구진은 지구로부터 90억광년 떨어진 곳에 위치한 퀘이사(準星)를 관측하는 과정에서 블랙홀 이론의 맹점을 발견했다고 주장했다.

퀘이사들은 중심부에 블랙홀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연구진은 14개의 천체 망원경을 사용해 이 퀘이사의 구조를 관찰한 결과 중심부 주변의 물질 원반에서 폭 4천AU(천문단위: AU는 지구-태양간 평균거리)의 거대한 구멍을 발견했다.

이들은 이런 구멍은 강력한 자장의 힘으로 거대한 물질이 튕겨나올 때만 생길 수 있는 것이라고 믿고 있지만 블랙홀에는 자장이 없기 때문에 MECO(자기권 항구붕괴 물체)라는 고밀도 플라스마 덩어리가 이런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고있다.

이들의 이론에 따르면 MECO의 존재는 블랙홀의 존재 가능성을 배제하는 것이다.

연구진은 "이는 블랙홀의 패러다임이 부정확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최초의 증거"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케임브리지 대학의 게리 길모어 교수는 이들의 연구가 대부분의 과학자들에게 설득력을 갖지 못할 것이라면서 지난해 우리 은하의 중심부에 존재하는 블랙홀을 직접 관측하는 획기적인 실험이 성공했음을 상기시켰다.

그는 "블랙홀을 관측하기 전에는 블랙홀의 존재 여부 자체가 논란의 대상이었지만 이제는 이론의 여지가 거의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서울=연합뉴스)

기사등록 : 2006-08-02 오후 01:43:26

http://www.hani.co.kr/arti/science/science_general/146043.html